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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cord to myself i.t.f/소설,에세이

[책 리뷰] 정세랑_시선으로부터

by Alliswell_dk 2022. 1. 5.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는 띠지를 보자마자 1초의 고민도 없이 책을 구입하였다. 정세랑 작가님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가장 최근에 출간된 이 책을 다른 책들보다 먼저 읽게된 셈이다. 이틀에 걸쳐 후루룩 읽고 지금 다른 책들은 구입 대기 중인 상태다.

심시선 가계도로 시작하는 이 책은 곳곳에 인물들의 말을 통해 작가님의 큰 통찰들이 가득 담겨있다. 또한 '별것 아닌 일에 진심을 다하는'(p308) 가족들 각각의 유쾌하고도 귀여운 포인트들이 가득해 끝 무렵엔 육성으로 웃기까지 했다. 어찌 이리 귀여울수가.

어찌보면 어울릴 수 없는 단어들_하와이와 제사와 같은_이 어울리며 공존하는 환상적인 이야기다. 멀리 보지 않아도 된다. 우리 집만 생각해도 환상 속의 이야기임이 틀립없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산다는 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책을 덮었던 그 순간만큼은 '생'이라는 게 좀 더 아름답게 다가왔다. (물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생각하니 그 시점만큼 아름답진 않다.)

책을 읽기 전엔 제목 <시선으로부터,>가 보는 시야, 관점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책을 다 읽고는 완벽하게 '심시선'으로부터 로 읽히는 재미있는 경험도 했다.


숫자로 나열되는 각 꼭지의 시작은 심시선의 (책에 쓰여진) '글'이나 (방송 출연 및 강연, 인터뷰에서 발췌된) '말'이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이 심시선이란 한 인물을 포함하여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다른 조각들을 그들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가족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시선을 포함한 가족 서로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세상 쿨하다. 특정 사건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며 상처주지 못해 안달인 현실 속 관계들만 보다가 꼬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을 소설로라도 보게 되어 마음이 참 좋았다. 정말로-

전체적인 내용, 흐름도 좋았지만 중간중간 와닿는 문장들이 너무 넘쳐서 노트에 옮겨 적으며 한 번씩 곱씹는 시간이 참 행복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가족을 포함한 모든 관계가 참 버겁게 느껴지며 인류애가 사라지는 요즘이었는데,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인물들을 만나고 사람을 사랑하는 작가님을 만나서 어제 오늘이 따뜻했고 즐거웠다. 올 해가 가기 전에 몇 번 더 읽어야겠다. #추천!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거고요. 각자 그 때까지 하와이를 생각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엄마가 좋아했을 것 같은 가장 멋진 기억을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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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지난 세기 여성들의 마음엔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하게 되었다. 십년 전 세상을 뜬 할머니를 깨워, 날마다의 모멸감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p26

"그렇게 단언하시면 안돼요. 세상에 단언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고, 단언하는 사람은 쉬이 믿으면 안 된다고 어머님이 네번째 책에서 한 단원 분량으로 말씀하셨잖아요?"

p29

창작의 욕구와 자기 파괴의 욕구가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라는 것이 언제나 나를 슬프게 했습니다.

p76

질투없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비틀린 데 없이 환한 안쪽을 가진 이만이 가능한 경지, 범인은 끝내 다다르지 못할 경지일지 몰라도 목표로 삼으려한다.

p102

꼬인 마음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p174

변명처럼 들리지 않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어떤 말들은 줄어들 필요가 있었다. 억울하지 않은 사람의 억울해하는 말 같은 것들은.

p182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p201

매일 비슷한 날들이 지속되면 머릿속에 깃발 같은 것이 남지 않는다. 깃발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p208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남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이랑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 후자 쪽이 훨씬 낫지."

"두 종류로 나누는 건 너무 단순화시킨 거 아냐?"

"그러게, 그러면 안 되는데."

p226

어른들은 기대보다 현저히 모르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p235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에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p256

세상은 참 이해할 수 없어요. 여전히 모르겠어요. 조금 알겠다 싶으면 얼굴을 철썩 때리는 것 같아요. 네 녀석은 하나도 모른다고.

p274

"전형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뭔지 알 수 없는 집안으로 장가를 왔지."

태호는 그렇게 자기 인생을 요약했다. 종잡을 수 없었던 장모를 태호는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장모로부터 뻗어나온 기세 좋은 여자들에게 감탄하며 살았다. 아내와 딸들을 사랑했고 처제들이 행복했으면 했고 해림이 가끔 자신을 새처럼 갸웃갸웃하며 쳐다보는 것도 싫지 않았고.

p305

스스로가 가엽고 불쌍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보다는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떤건지 이해가 가?

p325

말이란 건 그렇습니다. 일관성이 없어요. 앞뒤가 안맞고, 그때의 기분따라 흥, 또다른 날에는 칫, 그런 것이니까. 그저 고고하게 말없이 지낼 걸 그랬다 후회도 합니다.

p331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 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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